갈매못에서 순교한 네 성인이 잠시 안장되었던 곳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의 멍덕봉(명덕산) 기슭에 위치한 ‘서짓골’은 옛적에 박해를 피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다수 은거했던 곳이며, 병인대박해 때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다섯 성인 가운데 성 황석두 루카 회장을 제외한 네 성인의 유해가 1882년까지 16년 동안 안장되었던 곳이다.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중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트르(Aumaî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월 23일(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도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 중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 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 남포의 서짓골로 이장되었다.
네 성인의 유해는 장주기 성인의 아들 장노첨의 간청으로 ‘서짓골’ 이화만(바오로)과 그의 아들 이치문(힐라리오) 및 ‘도앙골’ 김순장(요한 금구)의 주도로 그해 4월 8일(양력 5월 21일) 이후 갈매못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곳에 1차 암장하였다. 그러나 그 암장묘를 산짐승들이 해칠 우려 때문에 안전지대로 모시기로 하여,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 요한 금구를 만나 의논이 되어 그로부터 경비를 충당 받고, 멀리 공주 국실(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에 사는 신 회장과 이치문 가족들의 추렴을 보태서 오천에서 삯배를 빌려 보령→남포→부사만→완장내 포구(현 웅천 하수종말처리장)까지의 해로와 웅천천을 거쳐 이동한 다음에 육로를 통하여 남포 서짓골까지 유해를 운송하여 서짓골 담배밭 한가운데에 광중 4개를 파고 봉분은 하나로 하여 안장하였다. 유해 운송과 안장을 담당하였던 ‘서짓골’ 신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후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나머지 신자들은 차차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서짓골’을 떠나게 되었다.
이 성인들의 유해는 그로부터 16년 후 파묘되어 1882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용산 신학교와 명동대성당에 머물다가 지금은 절두산 성지에 모셔저 있다. 그러나 이 4위의 순교성인들 유해가 육탈(肉脫)되어 그 뼈들만 옮겨가고 그분들의 살이 흙에 섞여 남은 진토는 아직도 이 서짓골 외교인들의 묘지들 사이에 묻혀 있다.”
현재 그 안장지는 보령시의 승인 하에 기반 조성중에 있으며, 표지석과 기념비를 설치하고 순례자들의 주차 공간과 도로변 공원 형태의 조경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또한 ‘서짓골’을 오천 ‘갈매못’과 연계한 순례코스로 하고, ‘완장내’와 ‘서짓골’을 잇는 웅천천변을 따라 도보순례코스를 조성하고, 그 순례를 정례화 하기 위하여 하부내포 성지 전담인 윤종관 신부께서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
서짓골 성지 바로 길 건너의 소형차가 들어갈 수 있는 소로로 얼마 가면 영천암이 있고 그 뒤가 옛 교우촌 터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아무 흔적이 없다.
※ 서짓골 성지 봉헌식
대전교구 하부내포성지(전담 윤종관 신부)는 2013년 10월 31일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67-2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서짓골'성지 봉헌식을 거행했다. 봉헌식에는 유 주교를 비롯해 사제단 20여 명, 파리외방전교회원 서봉세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800여 명이 함께했다.
서짓골 성지는 2013년 5월 미산면 평라리 일대 886㎡(268평) 크기 시유지에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부지를 정비하고 화장실과 파고라(정자), 주차장 등 기반을 조성한 후 야외 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성지 안내 비석, 성역 표지 시설공사를 마치고 이번에 봉헌식을 갖게 됐다. 무게가 50t이나 되는 제대석은 오석을 3.6×1.7×1.35m 크기로 잘라 만들었으며, 전면에 서짓골에 묻혔던 네 성인의 유해를 새겨 성인 무덤 모양으로 형상화했다. 8m(좌대 1.5m 포함) 높이 순교자 현양비에는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이라는 뜻의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 한자 구절을 새겼다.
보령시 측에서 만든 파고라는 다블뤼 주교의 한국식 이름인 '안돈이(安敦伊)'에서 따와 '안돈정'으로, 제대석 주위는 '돈이정원'으로 각각 명명했다. 안돈정은 순례자들을 편안하게 맞는 정자, 돈이정원은 후덕함이 넘치는 정원이라는 뜻이 담겼다.
이로써 서짓골 성지는 2011년 9월 충남 부여군 내산면 옛 교우촌 도앙골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 축복과 지난해 11월 천방산 줄기 옛 교우촌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에 이어 하부내포성지에서 세 번째로 봉헌된 성지가 됐다.
■ 성인들의 이장기(移葬記)
1866년 3월 30일 순교한 성인들의 시신은 3일간 전시된다. 황석두 루까 성인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삽티에 안장하였고, 나머지 네 순교자의 시신은 용감한 신자들이 형장으로 들어가 갈매못 모래밭에 매장한다.
1866년 음력 4월 8일 이 힐라리오(치문)는 집안 식구들과 조카사위 이 바르나바와 함께 성인들의 유해를 이장하기 위해 갈매못으로 갔고, 군인들의 훈련장이었고 인근에 주막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잔돌을 헐어냈다. 시체는 적신(赤身)이었고, 또 목은 다 각각 제 몸에 맞추어 놓고 칡으로 허리를 둘러 묶여 있었다. 그들은 칡 틈에서 오가(吳家), 안가(安家)라고 쓴 나무패를 발견한다. 이들은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구분하여 네 개의 지게에 지고 10여리 되는 곳에 봉분은 하나이나 광중은 넷으로 하여 매장한다.
그 후 얼마가 지나서 산소를 찾은 힐라리오는 여우가 구멍을 뚫어 놓았기 때문에 이장을 결심한다. 이 힐라리오는 당시의 상황을 블랑(白圭三, Blanc, Jean Marie Gustave, 1844-1890) 신부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여우가 구멍을 뚫은 고로 더 이상 그 자리에 버려 둘 수가 없어 이장하기로 하였다. 이장 비용으로 홍산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과 공주 국실점의 신 회장이이 40량을 대었고, 힐라리오의 형 이냐시오와 셋째 형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오 좌수(吳座首)에게 가서 50량을 얻어 왔으며, 또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40량을 대고, 힐라리오의 부친이 27량을 대어 가지고 음력 7월 13일 밤에 무덤을 파 본즉 시체는 거의 썩었고, 여우가 파먹어 민 신부의 엄지 발가락이 상하였으나 아주 떨어지지는 않았다. 냄새가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심했으나 칠성판은 그대로 사용하고 베로 다시 염을 하여, 날이 밝을 무렵에 배에 싣고 뱃길로 12일이 걸려 남포 서재골로 이장하였다.”
힐라리오는 그간의 고생을 이렇게 적고 있다.
“수로로 5리쯤 되는 여수리 큰 강 어귀에 가 있다가 바람이 일어나며 비와 뇌성이 크게 일어나니 이때는 밤이라, 모두 겁을 내고, 도로 가패라 하는 곳으로 두 번을 쫓겨 들어가서 또 나아가다가 술섬이라 하는 데로 쫓겨 밤에 풍랑을 겪어 거의 죽을 뻔하고, 아침에 밥을 시키고 사공이 나서 보더니, 오늘은 더 큰 바람이 일어날 터이니 진작 녹안이뿌리로 가자 하여 행선을 시작하매 바람이 크게 일어나 화살같이 달아나니 수로로 20리를 가서 녹안이를 가매, 떠날 때 안친 밥이 겨우 끓었으니 그 급하게 달아난 사정은 가히 알만하고, 물에 떠 있기를 8일을 하고, 집에 12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힐라리오는 남포 서재골 담배 밭 한가운데에 광중 4개를 파고 안 주교, 민 신부와 오 신부, 그리고 장주기 회장의 시신을 묻고 봉분은 하나로 만들었다. 주산(主山)을 뒤로 하고 동남쪽을 향해 섰을 때 왼쪽은 민 신부, 다음은 안 주교, 그 다음 오른쪽은 오 신부, 그 다음은 장 회장이었다.
1882년 한미조약에 따라 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용인되자 당시 부주교이던 블랑 신부는 병인년에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예비 조사를 위해 순교자들을 이장했던 이 이냐시오(치서)와 힐라리오(치문) 형제에게 면례를 지시하게 된다. 이장 작업은 음력 정월 21일 밤에 이냐시오와 힐라리오, 조카 안드레아와 조카사위 이 바르나바와 김 안드레아, 조카 프란치스코와 토다리 최서방(바오로) 등 일곱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힐라리오는 블랑 부주교에게 그 상황을 이렇게 보고한다.
“일곱 사람이 함께 산소를 파 본즉 횡대(橫帶)하였던 나무가 아래로는 모두 썩어 없어지고 뼈가 흙에 혼합되어 해골 위만 홍대 쪽이 남아 있어서 조심하여 낱낱이 백골을 모아 올 때에 흘릴까 조심하였으나 작은 뼈가 다 삭아 없어진 것도 있은즉 계골(計骨)을 하여 보매 혹 없어진 것도 있어, 모두 삭아 없어졌는지 혹은 흙에 묻혀 잃어버렸는지 자세히 모르고, 남아 있는 것은 해골과 팔과 다리와 갈비뼈는 각 위를 분간하여 종이로 각각 봉하여 백 신부께 바치는 사정으로 전후의 일장 일을 아는 대로 사실을 따라 기록하여 바치나이다.
임오(壬午) 2월 초4일 죄인 힐라리오”
면례하는 일에 참여한 힐라리오 형제를 위시한 일곱 명은 음력 2월 3일 불랑 부주교 앞에서 고상을 모시고 미사 경본 위에 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시체의 진실성을 허원 다짐하였다.
“죄인 등이 이번 신부님의 분부대로 병인년에 치명하신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장 회장의 시체를 면례하러 오라 하시기에 이 달 20일 밤에 파묘하여 본즉 전에 죄인 등이 장사한 모양으로 그냥 있으나 17년이 지났으매 백골이 혹시 삭아 없어진 것도 있고, 밤에 흙에 섞인 백골을 줍자 한즉, 아무리 조심스럽게 낱낱이 살피었으나 혹시 서실될까 염려되어 각 위를 백골 각각 봉하여 왔으며, 백골이 혹시 바뀌었는가는 일점 의심이 없기로 천주 대전에 아무 의심 없는 줄로 맹세하옵니다.”
홍산 남포의 서재골로 이장하였던 안토니오 안 다블뤼 주교, 위앵 민 루가 신부, 오메트로 오 베드로 신부, 장주기 회장 등 네 순교자의 유해는 1882년 3월 블랑 부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옮겨졌다가, 1894년 5월 22일에는 다시 서울 용산신학교로 옮겨졌고, 1900년 9월 10일에는 명동 주교좌 성당의 지하실에 안치되엇다. 그리고 1967년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지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이 거룩한 다섯 순교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시복되고, 1984년 5월 6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갈매못 성지 홈에서 인용]
■ 치명 장소와 치명자 묘지 발견
정규량 신부가 《경향잡지》(제19권 574~577호, 1925. 9. 30∼11. 15)에 올린 글이다.
“공경하올 안(다블뤼) 주교와 오(오메트르) 신부와 민(위앵) 신부의 산 자리 석죽골(서짓골 혹은 서리골)과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이 치명하신 갈마연 진터를 참배함.
“나는 벌써부터 이 복지를 심방할 마음을 두고 있던 차에 금년(1925년) 7월 5일은 조선에서 치명하신 공경하올 주교 ․ 신부와 남녀 교우 79위가 로마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처음으로 복자위에 오르시는 경사를 맞이했건만, 이런 경사에 참여치 못함을 원통히 생각하고, 이왕이면 공경하올 주교 ․ 신부 ․ 교우들이 치명하신 복된 땅이나 가보겠다는 결심으로 7월 5일(주일) 오후 1시에 보령군 미산면 평장리(현 평라리의 평장리) 석죽골을 찾아가는데, 소양리 성당(현 부여 금사리 성당의 전신) 아래 사는 이 바오로를 먼저 보냈다. 그 사람은 나이 71세로, 병인년 전에 석죽골서 살다가 13세에 떠났으며, 또 이 사람의 조부 이 바오로와 중백부 지슈(즉 긔수,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부친 힐라리오와 또 교우 최모는 본래 병인년 전부터 석죽골에서 살아오던 중이었다.
이상 4명이 공경하올 안 주교와 오 신부와 민 신부의 치명하신 시체를 70리 되는 수영 갈마연 진터에서 석죽골로 모셔 오는데, 때는 5월이었다. 자기가 사는 집 뒤의 골짜기요 또 자기가 부치는 밭 가운데 장사를 지낼 요량으로 광중을 크게 파고, 칠성판을 하나씩 받쳐 장사를 지내고, 그 위로는 묘의 봉분도 만들지 않고 밭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경신년(경진년을 말한 것인 듯. 그러나 경진년도 아니고 정확히는 임오년(1882년)이 맞는다)에 백(블랑) 주교의 분부로 전에 수영에서 이장해 오던 이 바오로 삼부자가 공경하올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3위 시체를 파서 강경리로 와 계시던 백 주교에게 모셔다 바쳤다고 한다.
보령군 미산면 석죽골의 위치로 말하면, 7월 5일에 금사리에서 나와 이 바오로와 도화담(현 보령시 미산면 도화담리) 공소 회장 김 빈첸시오와 그 공소 교우 김 요셉 등 도합 4명이 석죽골 동네로 들어갔는데, 호수가 78호나 되었다. 병인년 전부터 교우들이 동네에서 살아왔으며, 병인년 이전의 집은 모두 없어지고, 혹 약간 있더라도 모두 새로 고쳐서 지은 집들이었다. 동네 아래는 평평하여 다소의 전답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교우들의 전답들도 있었지만 군난 때에 모두 적몰되었다. 또 큰 내가 있어 남포 한내[大川]로 흘러간다. 이 지방으로 말하면 충청남도에서는 큰 산중이라 할 수 있다.
석죽골 동네에서 공경하올 주교 산소 자리로 올라가려면 한 5분 정도 걸리니, 그 산상봉을 근동 사람들이 부르기를 멍덕봉이라고도 하고 멍덕산이라고도 한다. 이 멍덕봉에서 북편으로 세 번째 봉을 타고 내려오면 매상리 바위를 만나는데, 매상리 바위에서 등을 타고 끝까지 내려오다가 동편 비탈로 내려서면 공경하올 주교 산소 자리를 만난다. 반은 산비탈을 차지하고 반은 평지를 차지하였으며, 앞에는 오치상의 담불[약 100평 크기] 밭이 있고, 산소 자리와 밭 사이는 담 형상의 바위가 둘러있으며, 누가 보든지 묘지 하나는 쓸 만하게 보인다. 그 자리에 28년 전에 그 동네 임성좌와 임원중의 부친 무덤을 썼는데, 공경하올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산소 자리는 그 무덤에서 바로 남쪽 고개를 향해 두 걸음 가량 되는 곳이다.
이후에도 이런 모양으로 찾아가면 알기 쉬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시작하여 20보 가량 내려가면, 병인년 이전에 죽은 교우들의 무덤 세 개가 있다. 전해 내려오기를 몬도리 요왕의 부친 정씨 무덤과 장씨 무덤과 20세 된 동정녀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봉분은 조그마하다. 지금까지 임성좌와 임원중 형제가 자기 부친의 무덤을 벌초할 때 교우들의 무덤 세 개까지 벌초를 한다고 한다. 또 주교 산소 위로 있는 10정보 가량 되는 산은 그 동네 새초장(억새풀밭을 말하는 듯함)인데, 보통 소도 먹이고 풀을 베어서 말렸다가 겨울에 소 먹이기 위해 그 동네와 면에서 상관한다 하며, 산에는 별로 나무가 없고 무성한 풀뿐이었다.
■ 순교자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Daveluy) 주교 (1817∼1866)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2016년 9월 29일에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당에서 병인순교자 4위 유해봉안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병인년에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고 서짓골에 묻히셨던 4위 순교성인 유해를 1882년에 옮겨서 1894년까지 12년간 봉안했던 오우라 천주당에 하부내포의 서짓골에서 출토한 석재로 기념비를 세웠다.
그 4위 순교성인은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님과 성 베드로 오매트로 신부님과 성 루카 위앵 신부님과 성 요셉 장주기 회장님이다.
1866(병인)년에 서짓골의 신자들에 의해서 묻히신 후 서짓골 신자들 또한 순교하고 1882년까지 16년간 그 잊히어진 서짓골의 산비탈 무덤 속에서 진토되고 남은 4위 성인의 유골을 조선 땅에서 모셔둘 곳이 없던 그 엄혹한 시대에 나가사키 오우라 천주당에 옮겨 모셔야만 했던 역사를 되새기면서 그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 친히 현지에 가셔서 제막식을 거행하셨다. 나가사키 대교구장이신 요셉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님의 성수 축성에 이어서 기념비의 제막 의식이 거행되었다. 양위 주교님과 나가사키 시 관계 대표자와 대전교구 평협 박원규 회장께서 가림막을 벗겨주셨다.
이어서 유흥식 주교님께서 기념비와 참석자들에게 성수를 뿌리시며 축복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나가사키 대교구장 요셉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님의 축사를 경청하고,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기념사를 경청하였습니다. 그에 이어서 기념비 건립을 승인하고 기여한 나가사키 현과 시청의 관계인사들에게 감사패 와 공로패를 유흥식 주교님께서 수여하시고, 나가사키 현 지사의 축하 메시지를 경청하였다. 이어서 대전교구의 전 신자를 대표하여 박원규 평협 회장께서 감사의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86명의 대전교구 순례단과 현지 일본 신자들이 일본어로 '주님의 기도'를 합송하고, 양위 주교님의 강복으로 제막식을 마쳤다.
■ 찾아 가는 길
■ 순례지 정보
맹세영 세례자요한 신부 010-5454-3950
홈페이지 http://cafe.daum.net/southnaepo
미사시간
삽티성지 '성석당' 주일 : 오전 11:00
서짓골성지 '돈이관' 주일 : 오후 14:00
순례미사(평일미사) 하루전 연락주시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에 봉헌함
교통편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는 대천IC나 춘장대IC에서, 서천공주고속도에서는 서부여IC에서 나와 보령호 동쪽 617 지방도로를 따라 호수 남쪽 도로로 가다 우회전하여 가다가 녹전리에서 우측 지방도로로 가다가 우측에 성지 공사장 표지가 있다.